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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믿음, 희생

kkyyuu 2022. 5. 10. 15:50

부대에서 묵혀놨던 관람권으로 영화를 보여줬다.

어디든 단체는 비슷하고, 뭐든 겪으면 할만하다. 군대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엄청났을 때가 있다. 어릴 때는 여느 아이들처럼 막연히 두려워했고 통일을 바랐었다. 어렸을 적 받았던 통일교육을 내가 똑같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모습은 신비롭다.

아직까지는 모든 경험과 감정들이 한 곳으로 귀결되고 있다. 누나는 언제까지 그럴 셈이냐고 질책의 질책이다.

오늘 스크린에서는 아프고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가 나왔다. 어렸을 때 보던 만화 영화 테이프에서도 비슷한 인물이 나온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아파트에 살 때고, 내 기억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니 대여섯 살쯤의 기억일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그런 상을 담아왔던 것 같다. 아직 의미 부여할 의지와 능력은 남아있는듯해서 다행이다.

악의 기준이 모호해지는 것처럼 선의 기준도 모호해지는 걸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예전부터 혼돈을 바로잡기 위해 클래식을 탐구해왔다. 몇 천년 전부터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고, 그 진리가 위험부담이 적을 테고 정답에 가깝기 때문일까. 성경에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이유도 거기 있을 거다.

막연하게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졌었다. 어찌 보면 많은 분야에 막연히 그리 대했었고, 의심했던 사례들이 나올 때면 ‘역시 그럼 그렇지.’하기 일쑤였다. 끊임없는 의심, 대화또는 논쟁만이 최고 단계에 다다를 수 있다고 했거늘.

세상은 믿음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다.
저 멀리 포식자가 다가온다는 말에 대한 믿음,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을 거라는 믿음, 나는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는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 같은 것을 믿는 자에 대한 믿음.

여직 지금까지 나는 왜 위에서 아래로 가는 느낌일까. 아래에서 위로 올랐어야 하지 않았을까. 스키는 즐겁지만 등산은 왜 힘에 부칠까. 그래서 바다를 좋아했어?

의미 없이 보낸 지난 시간들이 야속하다. 앞으로 나아갈 의지와 고통에 맞설 자신은 가득하다. 그럼에도 왜인지 주춤하게 된다. 내가 또 잃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희생해야만 날 앞으로 보내줄 것인가. 피터슨은 젊음의 큰 이로움 중 하나는 무엇을 희생할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생할 선택지가 줄어들고, 혹여나 희생할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조금 나중까지 희생하지 않고 남겨두면 안 될까요? 어쩌면 작은 원자로 분해되기 전까지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될까요? 그저 잔잔한 파도에 몸을 맡겨서는 안 될까요?